Saturday, January 27, 2007

제목: 야만시대의 기록
지은이: 박원순
출판사: 역사비평사
발행: 2006년 10월 20일

가격은 열라 비싼 데다가, 읽는 사람을 끝간 데 없이 우울하게 만들어 주는 이런 책을 왜 읽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읽으면서 피곤하고 화가 나고 우울해짐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반드시 이런 글을 읽고 이 사실을 알고 있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아무도 기록하지 않는 역사, 고문의 한국현대사 라는 부제가 말해주듯이 이 책은 고문, 특히 우리나라에서의 고문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이토록 험한 고문이 이토록 흔하게 행해졌다는 사실, 또, 그 결과로 나의 내면에까지 상당 부분의 고문이 당연시 되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비참하다.

내가 대학에 입학할 때, 엄마는 절대로 데모만은 하지 말라고 신신 당부를 하셨다. 같이 살고 싶은 여자 있으면 걱정 하지 말고 데려 오기만 하라고까지 하신 어머니가 절대로 데모는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당시, 나는 사회나 정의 등에 대한 개념이 국정교과서 수준을 크게 넘지 않고 있었기에, 국가에 대드는 데모라는 것은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과는 별개로 불온하고 불순한 행동이라고 여겼던 듯하다. 게다가 내 개인의 영역에서는 헌법보다 고귀한 어머니 말씀이기도 했다. 심지어는 당시까지는 미국이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나라라고까지 여겼을 지경이니...... (불행히도 많은 수의 한국인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세월이 흘러 가며, 9-11과 함께 내 의식도 많이 달라졌고, 여기 저기서 주워 들은 이야기를 퍼즐 맞추듯 꿰어 맞춰, 우리 일가 안에서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지도 그럭 저럭 알게 되었다. 사촌형 중에 한 명이 데모를 했다가 경찰서에 갔었다는 사실도.

이 책을 읽으면서, [데모를 했다가 경찰서에 잡혀갔다] 는 것이 어떠한 의미였는지를 알게 되었다. 모든 인권을 상실한 채, 내 조국이 내게 가하는, 그 누구도 막아줄 수 없는 폭력 앞에 내던져져, 다시는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을 지경으로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고 망가지게 된다는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대해서는 어떠한 보상이나 처벌도 없다는 잔인한 현실.

그런 현실들이 신문 기사, 법원 판결문 등의 상당히 객관적인 기록으로 이 책 안에 나열되어 있다.

엄마는 또, 자주 밤길 조심하라고 말씀하셨다. 비록 건장한 체격은 아니어도, 젊은 남자로서 범죄에 대해서는 비교적 안전지대에 있다고 생각하는 내게 엄마의 그런 걱정은 말 그대로 기우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나서서 미친 짓만 하지 않으면 범죄의 희생양이 되진 않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 꼭 그렇 지만도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엄마가 조심하라고 말했던 [밤길]은 범죄자의 비열한 밤길이 아니었다.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음습한 공권력의 밤길이었던 것이다. 불의의 상황에 나를 지켜 줄 최후의 보루가 되어 주어야 할 국가가 나서서 나를 먹잇감으로 삼겠다고 덤벼드는 형국에 도대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일단 조사실(사실은 고문실)에 들어가면 정신을 못 차리도록 흠씬 두들겨 패고, 비녀꽂이, 통닭구이, 비행기 등등의 매달기 고문을 기본으로 물고문 전기고문을 병행한다. 굶기기, 잠 안 재우기, 매질은 평범한 일상일 뿐이다. 요즈음은 첨단 과학의 혜택으로 각종 약물도 즐겨 사용된다고 한다. 그곳에 끌려간 사람은 결국은 온 몸과 마음이 망가져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일을 각본에 맞춰 자백(자백보다는 암송이 더 어울릴 듯하다.)하게 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전혀 무관한 지인들 몇 명을 똑같은 파멸의 늪으로 끌어들이는 것으로 야만시대의 체험을 마무리하게 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죽을 수도 있는데, 죽으면 그냥 의문사다. 탁 치면 억 하고 죽는 사람이 있는 반면, 가만히 놔 뒀는데 보니까 죽어 있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가끔씩, 내가 저 상황에 처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철저하게 무기력한 좌절감을 잠시나마 체험하게 된다.

이 책, 재미 없다. 열라 비싸고, 열라 두껍다. 하지만 우리가 대통령을 욕할 수 있는 자유를 얻기 위해서 지금까지 어떠한 대가를 치렀는지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것 같다. 이 일을 망각하면 우리는 언제라도 친일파의 딸이 지배하는, 경제 성장을 위해 인간을 거름으로 여기는 사회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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