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현경
출판사: 웅진 지식하우스
발행일: 2011년 11월 25일
부제에 이슬람 순례에서 얻은 99가지 지혜라고는 했는데, 그 99가지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책을 너무 대충 읽었나?
저자는 뉴욕 유니언 신학대학의 교수이다. 기독교 계열로 추측된다. 이슬람에 대해 이해해 보고자 1년의 시간을 내서 17개국의 무슬림을 만나고 온 이야기를 적었다.
원래부터 종교란 인간 두뇌 기능의 버그 비슷한 거라고 여기는 내 입장에선 '그래, 무슨 얘기를 하나 어디 한 번 볼까?' 라는 생각 반쯤, 또, 우리나라에선 적잖이 생소한 이슬람의 깊이 있는 이야기를 알고 싶다는 생각 반쯤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딱히 철학적 깊이가 있는 내용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슬람에 대한 깊이 있는 내용을 다루고 있지도 않다. 오히려 약간의 사색을 담은 '여행기'에 가까운 느낌이다. 저자의 의도가 이슬람에 생소한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 살아가고 있는 무슬림, 그중에서도 특히 여성들이 이슬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하는 데 있다면 그쪽이 더 자연스럽기도 하다.
그래도 학문을 다루는 '교수'라는 직함에 걸맞지 않게 용어들을 세심하게 사용하지 않은 점도 좀 맘에 들지 않는다. 이슬람, 이슬람인, 무슬림, 무슬림인 등과 이와 비슷한 합성어들이 많이 눈에 띈다. 나는 무슬림 이라는 단어가 이슬람인 정도 되는 뜻으로 알고 있었는데, 명확한 정의 없이 혼용되는 여러 낱말들을 읽다 보면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지금도 모르겠다. - 어쩌면 '공돌이'의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코란이 절대적이라는 이슬람의 본래 뜻과는 달리, 17개국에서 만난 이슬람은 적어도 34가지의 다른 모습을 보인다. 나라마다 다르게, 한 나라에서도 기득권과, 기득권 바깥쪽이 다르게.
상당 수의 무슬림 여성들은 이슬람을 자연스럽게 삶의 지표로 삼고 있는 듯하다. 서구의 사상보다 오히려 더 여성을 존중하는 사상이라고까지 여기기도 하는 듯하다. 나로서는 정말 어이가 없는 해석이 두 가지가 있었다.
한가지. 여성은 일단 쓰개옷 - 정확한 용어를 모르겠다. 히잡, 부르카, 차도르, 그 밖에도 최소한 서너 가지는 더 본 것 같은데 무슨 차이가 있는 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 을 입으면 그 안에서 자유란다. 그게 이슬람이 여성을 보호하는 방식이란다. 왜 여자는 걸레같은 뭔가를 푹 뒤집어 써야만 보호를 받는 걸까? 남자들은 그런 것 없이도 존엄한 인간인데.
또 한가지. 일부다처제가 더 좋단다. 정말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는데 유부남이면, 불륜으로 지내거나, 창녀가 되는 것보다는 두 번째 아내가 되는 것이 당연히 더 나은 선택이란다. 나도 모르게 [ㅁ친ㄴ] 이라는 욕이 튀어나왔다. 평생 유부남이나 따라다니며 살아라.. ㅉㅉ 난 내가 여잔데 내 남편이 어느날 둘째 부인이라고 데리고 오면, 절대로 그냥 안둔다. 죽거나 죽이거나, 최소한 헤어지기라도 해야 직성이 풀리겠다. 하긴, 저런 여자들은, 좋게 말하면 이슬람이 체화되어, 좀 더 현실적으로 얘기하자면 뼛속까지 세뇌되어 있어서, 어느날 자기 남편이 세째 부인이라고 딴 여자를 데려와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일부일처제가 유일하거나 최선의 가족제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최소한 여자도 공평하게 네 번째 남편까지 맞을 자유가 있다면 일부다처/일처다부에 대해 비난할 생각이 전혀 없다. 그런데 남자는 여러 배우자를 얻을 수 있고, 여자는 그렇지 않은데도 그 제도를 자기 멋대로 재해석 해서 '여성 존중'까지 이끌어내는 여자들을 보면 한심하다 못해 화가 난다.
악명 높은 자살 폭탄 테러 등에 대해서도 '원래 이슬람은 그런 게 아닌데.....' 라는 정도의 반응을 보인다. 물론 원래는 그렇지 않겠지. 일부 과격파의 행동일 뿐이겠지. 그러면 이건 어떨까? 미국과 유럽의 언론이 이슬람에 대해 편파적인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철저한 무관심에 가깝고. 그런데 자유민주주의는 원래 그런 것 아니라구요. 일부 군산복합체의 교활한 선동질일 뿐이라구요.
우리나라에서 '대학교수'의 삶은 얼마나 '평균적인 국민'의 삶과 가까울까. 또는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 저자가 이역 만리 타국까지 가서 만나는 사람들은 과연 그 나라의 '평균적인 국민'에 얼마나 가까울까. 또는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 내 주면에 나름 국제 활동을 하면서 외국인과 의견 교환을 하는 사람이 몇 명쯤 될까? 저자와 의견을 나누는 사람들은 대부분 상당한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점도 읽는 내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바깥은 비록 어떨 지 몰라도, 무장 경비원이 지키는 집안에서 마치 뉴요커처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무슬림이라고? 그들에게 종교란 거추장스러울 땐 언제든 벗어둘 수 있고, 내킬 때엔 집어들 수 있는 일종의 교양 내지는 정신적 사치의 일종으로 보이는데?
앞서 얘기한 것처럼 약간의 철학적 사색을 담은 이국적 여행기로 읽으면 무난한 책이다. 하지만 이슬람에 대한 이해를 원하거나, 저자가 이슬람 순례에서 얻었다는 지혜를 나누기에는 상당히 아쉬운 책이다. 만만찮게 두꺼운데......
다음 두 내용은 너무 마음에 와 닿아 여기 인용한다.
책의 맨 앞에 나온 다음 시는 루미 라는 시인의 시란다.
봄의 과수원으로 오세요.
빛과 와인, 석류꽃 향기가 가득하네요.
당신께서 오시지 않으시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요.
그리고......
당신께서 오신다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요.
"만나면 폭력이 중지되고, 못 만나면 폭력이 시작된다."
그런데 우리가 이슬람을 만나고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는 걸까? 이슬람이 우리를 이해할 필요는 있는 걸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
Labels: 신의 정원에 핀 꽃들처럼, 이슬람, 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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